“하루가 왜 이렇게 길지” 그 말 이후로 달라진 것들
“오늘 하루종일 뭐 했어?”
그날 왜 그런 말을 꺼냈는지 모릅니다.
별 뜻은 없었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진 말이었습니다.
근데 엄마가 한참 말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글쎄... 티비 좀 보고, 누웠다가, 밥하고, 다시 누웠지 뭐.”
그 말이 너무 낯설게 들립니다.
이상합니다.
엄마는 원래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김장 담그고,
집안 여기저기 쓸고 닦고,
여름이면 제일 먼저 베란다 문 열고 환기시키던 분이셨습니다.
근데 이제 하루가,
그냥 누웠다가 또 누웠다가
끝난다고 하십니다.
그때 조금 무섭습니다.
아, 사람이 아니 엄마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시간이 많아지면,
몸보다 마음이 먼저 약해진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걷기라고 다 같은 걷기가 아닙니다
다음날 나는 엄마한테 같이 나가자고 했습니다.
그냥 나와 함께 걸으러 나가보자고 말입니다.
엄마는 “귀찮다”고 하셨다가,
다음 날엔 말없이 운동화를 신으셨습니다.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그날 걸은 거리?
고작 단지 한 바퀴입니다.
근데 느낌이 다릅니다.
엄마가 갑자기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이 불어서 눈물 나더라.”
“아니 진짜, 괜히. 이유는 없어.”
그때 알게 됩니다.
걷기가 뭐 대단한 운동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밖에 나가서 살아 있는 공기를 한 번이라도 마시는 것,
그게 몸이 아니라, 엄마의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고 엄마의 일상을 좀 더 건강하게 만드는 시작이라는 점입니다.
어떤 날은 10분 걷고 들어오십니다.
어떤 날은 40분 넘게 걷고 오십니다.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그냥, 하루에 한 번이라도
엄마가 “나갔다 왔다”고 말해주는 게
나에겐 제일 고마운 일입니다.
바질 키우기,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입니까?
화분을 하나 사다 드렸습니다.
마트에서 2,900원이었나.
바질이었습니다.
엄마는 그게 뭐냐고 물으셨습니다.
“먹는 거야?”
“허브야. 그냥 예뻐서 샀어.”
엄마는 그걸 식탁 한쪽에 놓으셨습니다.
처음엔 별 반응 없으시더니
며칠 지나니까 엄마가 관심 갖고 아침마다 물을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물을 너무 많이 줘서 내가 말렸습니다.
그랬더니 “얘도 목마를 수 있지”라고 하시면서 웃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엄마가 말씀하셨습니다.
“얘는 햇빛을 좋아하는 거 같아.
그늘에 두면 시무룩해져.”
나는 대답을 못 했습니다.
왜냐면 엄마는 진심이셨고,
그걸 놀릴 수 없었습니다.
그 후로 엄마의 하루가 조금 바빠졌습니다.
화분 옮기기, 시든 잎 떼기,
이파리 만져보기.
엄마가 화분이랑 말하는 걸 보면서 엄마가 그동안 말 상대가 없어서 심심하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사람이 말 상대 없을 때 식물한테 마음을 여는구나 싶습니다.
슬프기도 하지만,
그 시간만큼은 외롭지 않아 보여서 다행입니다.
하모니카 수업 가는 날엔 옷차림이 다릅니다
복지관에 하모니카 수업이 있다고 어느 날 엄마가 나한테 말씀하셨습니다.
엄마는 그냥 “한번 가볼까?” 하시더니 진짜로 갔다 오셨습니다.
처음엔 “잘 안돼. 입이 아파”라고 하시며 갈까 말까 하셨지만, 그래도 재미있어 하셨습니다.
그랬는데 어느 날,
내가 낮잠 자고 있는데
“삐-뿌-빕”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고향의 봄이었습니다.
엉성했지만 진짜 음악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엄마는
수업 있는 날엔 머리도 감고 나가십니다.
옷도 밝은 걸 입으십니다.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지만
그날은 외출입니다.
“아직 내가 소리 낼 수 있다는 게 좋아.”
엄마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 말이 계속 남습니다.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
그건 단순히 하모니카 얘기가 아니라 우리 엄마 이야기입니다.
우리 엄마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수첩에 혼잣말 적는 사람
엄마는 수첩에 가끔 메모를 하십니다.
몰래 본 건 아닌데
우연히 펼쳐보게 됐습니다.
“오늘 햇살이 좀 따뜻했다”
“상추가 안 자란다. 삐쳤나”
“걷다가 까치가 울어서 화났다”
이게 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냥, 엄마가 말할 곳이 없을 때
글을 쓰는구나 싶습니다.
아무도 안 읽을 글.
엄마 자신에게 보내는 글.
속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이렇게 글자로 세상에 외치는 엄마의 마음.
이러면 엄마도 마음이 좀 가벼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하루에 내가 기다리는 게 하나라도 있으면, 그게 건강입니다
요즘은
엄마가 “오늘 뭐했어” 물어보면
“걷고 왔지. 상추 물도 줬지. 하모니카 연습도 좀 했지 뭐.”
이렇게 말이 많아지셨습니다.
물론 아직도 TV도 보시고,
누워 계시는 시간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 전체가 ‘누웠다’는 말은 이제 안 하십니다.
그게 다입니다.
건강이란 거창한 게 아니라
‘오늘 내가 할 게 하나 있어’
이 말 한 줄이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박수 칩니다.
엄마, 오늘도 행복하게 살아줘서 고맙습니다.